"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

낮에는 따가운 하늘, 밤에는 이불을 당기는 변화의 계절,
슬그머니 왔다가 어느 틈에 가버리는 아쉬움의 계절.

짧은 계절을 위한 마지막 추수에 우리의 등골이 휘어질 때,
철없는 아이들은 산과 들을 분주히 오간다.

에미도 에비도 계절에 바쁘고, 귀찮은 애들은 저들을 따라가니,
고요 만 있는 계절의 한 낮에는, 자연의 기쁨이 우리를 대신 한다.

방문 앞 마루 위에는, 벌레들의 행진이 한창이고,
먹다 남은 식탁 위에서는, 그들의 웃음 소리가 고요를 대신할 때,

앞마당 멍석 위에 널려 있는 빨간 고추 위에는,
두어 마리의 잠자리가 마지막 짝짖기를 하고,

따가운 계절의 햇살이 반쯤 드리워진, 처마 밑 평상 위에는
사랑의 유희도 힘에 겨운지, 잠시 내려와 쉬는 빨간 잠자리.

담장을 따라 핀 계절의 코스모스 위에는
나비들의 한가로움과 벌들의 부지럼이 어지러운 시간,

어디선가 홀로 남은 매미의 소리는,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워 하고
멍석 위에 빨간 고추 그 빛을 더 하고, 계절의 빛은 따가움을 더 한다.

시끄러운 소음의 계절, 여름은 지나가고,
풀벌레와 귀뚜라미의 절절한 소리가 떠나가는 여름을 위로 할 때 쯤이면,

고요의 계절, 사색의 시간에, 촛불이 그리워지고,
점점 깊어가는 밤에, 심지를 돋우며, 가을을 맞으면

가을, 가을의 밤은,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
나는 지나간 아름다움을 기억 하기로 한다.

-k1-

샤론의 꽃 예수

지난 주일에는 교회 뜰에, 무궁화 꽃이 활짝 핀 것을 보았다. 생긴 것이 요즘 사람 좋아하는 섹시미는 하나도 없고, 말도 없고 덤덤한 것이, 시골 장터에 같다놓으면 누가누군지 알 수 없이 생긴 터라, 말이 활짝 피었지 어느누구 하나 집적대는 자 하나 없으니, 혼기 놓친 딸년 가진 늙은 부모, 속 터지게 하기 좋은 꽃이라. 그래도 요즘 말로 display를 좀 잘 하면 펏득 팔리지 않을가 해서,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할 것이니, "보소 보소 성님네들, 그냥 후딱 가지말고, 오다 가다 한번씩, 웃어주고 만져주소." 넓은 아량으로, 한번 이렇게 해주시기 바란다.

꽃마다 거기에 얽힌 꽃말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궁화 꽃의 꽃말은 일편단심이라고 한다.
7,8월에 피기시작하는 이꽃은, 위에 잠시 언급함과 같이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꽃은 아니지만,
크리스챤들에게는, 특별히 한국의 크리스챤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꽃이다.
무궁화꽃이 영어로는 the rose of sharon 이다. 직역을 하면 샤론의 장미라고 하겠지만, 무궁화꽃의 영어 이름이며, 때로는 "샤론의 꽃"으로 번역 되어지는데,,,
이쯤하면, "샤론의 꽃 예수" 라는 찬송가 89장이 생각 날 것이다.

찬송가 89장의 "샤론의 꽃 예수"란 말은 성경 아가서 2장 1절인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하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신학적으로 예수를 의미 한다고 정의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샤론의 수선화가 왜 샤론의 꽃이요 또 무궁화 꽃은 왠말인가 하겠지만, 한글성경의 사론의 수선화가, 원래 영어성경에서는 the rose of sharon으로 되어 있고, 찬송가 89장 "샤론의 꽃 예수"는 여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글성경(개역개정,개역한글,새번역,,,)에서는 샤론의 수선화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NIV,KJV,NASB)에는 "I am the rose of sharon" 이라고 쓰여 있고, 오직 아가페 발행인 "쉬운 성경"에서만 아가서2장1절을 나는 샤론의 꽃이요, 라고 번역하고 있다.)

미국에 있는 spring hill nurseries의 internet site에서 보면 수많은 종류의 the rose of sharon이 있는데, 그 중에도 언득 보기에 blue bird 혹은 helene rose of sharon이 우리나라의 무궁화와 같이 생긴 것 같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 꽃이 수많은 종류의 무궁화과 속에서 정확히 어디에 속한 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쩠든 무궁화꽃은 영어로 the rose of sharon이라고 한다. 이 무궁화 꽃이 서기전 965년경, 지금으로 부터 한 3000여년전에 지었다고 하는 아가서에 언급 되어지고, 신학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자로써 예수의 나타나심을 예언할 때에, 그 구세주의 표현을 샤론의 꽃(the rose of sharon), 무궁화 꽃 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3000여년전의 성서 기자가 앞으로 나타날 인간의 구원자를, 멀고 먼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의 조그마한 나라의 국화인, 무궁화 꽃에다가 비유 했으니, 예수를 믿는 한국사람으로써 이 어찌 경천 동지할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성서 번역학자들이,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번역을 따라서 "나는샤론의 장미", "나는 사론의 꽃", 혹은 " 나는 무궁화 꽃이요, " 뭐 이런 것 등으로 번역하지않고, "나는 샤론의 수선화"라 번역하고 있으니, 고결한 학자님들이 하시는 일이라 깊은 뜻이야 잘 모르겠지만, 민족적 크리스챤의 하나로써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과 , 조그마한 연결만 있어도 자신과 무슨 큰 관계가 있은 것처럼 떠벌리고 싶고 , 벼락부자가 된후 어찌하든 쓰러진 족보 하나 사서 과거를 색칠하고픈 심정과 같은,
내 세울 것 하나 없는 우리로서는 이처럼 우리의 자긍심을, 족보에 적어 한껏 부플려볼 절호의 기회를, 그 뻐기고 싶은 순진한 크리스챤들의 그 심정을 냉정하게 삭득 잘라버렸으니, 그들이 우리와 무슨 억한 심정이 있는지 , 너무 억울해서, , , 인터넷으로 그들의 뒷조사를 한번 해보면 어떨가, , , 혹시 일본 극우세력의 자금 줄은 닿지 않아는지, , , 별생각을 다 해 보는데 , , ,
"당신들이 무엔데 대국(미국)의 따름을 감히 거부하고 그태여 힘드려 요상하게 번역했는가".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들 전문가들이야 전문가답게 히브리어 아람어 따져가며, "원문에 충실했다", 라고 할 것임에 듣지 않아도 뻔할 뻔자 아니겠는가.

번역이란 말이 나왔으니 나도 한마디 하겄다.
옛날 한국전 당시의 이야기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사람 실명은 전부 기억이 나지않는다.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 다음의 무슨 사령관이 한국전선에 시찰을 왔던 때이다. 전선의 많은 장병들에게 연설을 하는 도중 장병들의 사기도 북돋을겸, 웃기기 위해 우머스러운 죠크를 했는데, 백인엽인가 백선엽장군인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어도 변변찮은데, 통역을 잘한들, 선비(?)족속인 백의민족에게 양코백이 조우크가 먹히기나 하겠는가 ),
머뭇머뭇 거리던, 그 장군이 마침내 병사들에게 통역 하는 말씀이
" 여러분, 사령관 님께서 우시게소리(조크)를 하셨는데, 우리 다 같이 한번 웃어줍시다." 병사들이 와~하고 웃었다고 한다.
사령관은 자신의 연설에 만족한듯 흐믓한 미소를 지우며 연단에서 내려간 다음, 옆에 있던, 영어를 정말 잘 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시는 말씀이
" 자네 통역 정말 잘 하는구만".

샤론의 무궁화, 샤론의 꽃, 샤론의 장미, 이 좋은 번역을 다 놔두고 , 물도 없는 황량한 사막지대(팔레스타인)에 핀 꽃을 샤론의 수선화(水仙花), 물 수자가 들어 있으니 물이 많아야 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 분위기가 맞지 않는 수선화라 번역하고 있으니, 차라리 "우리한번 웃어 줍시다" 하며 슬적 넘어가는 번역이 "자네 통역 정말 잘 하는구만" 하는 이 대통령 말씀대로 더 멋진 번역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에, 고지식한 샌님 번역자들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바이다.
내가 왜 이리 영양가 없는 일에 힘을 주는가 하면, 우리교회 뜰에 예수님의 상징인 the rose of sharon, 무궁화가 피었는데, 누구 한사람 눈길 주는 자가 없으니 , 마치 주인 없는 잔칫집에 객들만 가무(찬송)하고 퍼마시고 하는 것 같아. 주인(주님) 보시기에 너무 민망해서,,,
이 글을 보는 님들은 다음 주일에는 교회 마당에 외롭게 핀 샤론의 꽃, 무궁화꽃을, 이처럼 못난 자들과도 한번쯤 만나, 동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영양가 없는 말씀을 주저리 주저리 하는거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로 우리 웹사이트에 빽뮤직으로 89장"샤론의 꽃 예수"를 한곡조 꽝 했으니,
"보소 보소 성님네들, 그냥 후딱 가지말고, 오다 가다 한번씩, 웃어주고 만져주소."

뵈뵈 파일에 보냄

뵈뵈사진05/3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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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칼럼


-시애틀에 라일락 꽃이 필 때 쯤이면-



시애틀에 라일락 꽃이 필 때 쯤이면, 한 겨울 내 쉼 없던 나의 비님도, 지친듯 수줍은듯 햇살 뒤에 몸을 감추곤 한다.

시애틀에 라일락 향기가 창을 두드리면, 한 겨울 내 사랑하던 술람미 나의 비님도, 이별을 예감하듯 창문을 연다.

시애틀에 라일락 꽃이 바래질 때 쯤이면, 입술을 깨물던 나의 비님도, 해맑은 햇살에, 못내, 이별을 준비한다.

시애틀에 유월이 올 때 쯤에는, 라일락은 무성한 잎만 남겨지고, 나도 나의 비님도, 끝내, 서로를 잊기로 한다.

시애틀에 유월이 질 때 쯤이면, 햇살은 포도원의 작은 여우가 되고, 나도 나의 비님도, 이젠, 서로를 망각한다.


-앞 뜰에 있는 라일락을 보며-